휘종의 무능함이 송나라의 부를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김안수 기자
February 8, 2025
송나라 휘종의 시대는 차 문화와 차 산업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 이 나라는 전 세계 GDP의 22.7%를 차지하며 부유한 국가로 알려져 있었다. 차 산업은 송나라의 재정 수입의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국방과 외교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차마 교역과 풍부한 국부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송나라의 제7대 황제였던 철종이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최고 어른인 상태후는 철종의 이복형제인 조길을 지지했다.
그러나 조길은 제위 계승 서열이 낮았고, 중신들 사이에서도 인품과 능력 부족으로 비판받는 인물이었다. 제6대 황제 신종의 11번째 아들인 조길은 어린 시절부터 고모부와 함께하며 제왕학보다는 오히려 쾌락적인 생활을 배웠다. 이에 대해 장돈 등의 대신들은 그가 황제의 자격이 없다고 반대했으나, 상태후는 그의 관상과 운세를 근거로 반대 의견을 무시했다. 상태후의 섭정 하에 조길은 제8대 황제 휘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하자마자 휘종은 자신에게 반대했던 중신들을 모두 파면했으며, 상태후의 섭정 기간은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상태후는 불행하게도 원인 불명의 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휘종은 후궁 유씨의 추천으로 채경을 요직에 배치하고, 그를 대명부지사로 임명하였다. 채경은 환관 동관의 지지로 한림학사로 승진하고, 이후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채경은 송사 '간신전'에 기록될 정도로 역사상 최악의 간신으로 평가받았다.
휘종은 정사를 소홀히 하고 개인적인 욕망을 쫓았다.
그는 시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며, '서학도'라는 대표작을 남겼다. 또한, 1107년에는 차에 관한 전문 서적 '대관차론'을 집필하여 송나라의 차 산업 발전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천하제일'로 묘사된 용단봉병차는 송나라 최고의 차로, 황실 전용 공차로 진상되었다.
차 산업의 중심지는 전국에 1336곳에 달했으며, 특히 봉황산 북원에서 많은 인원이 용단봉병차를 생산했다. 용단봉병차를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고 고된 작업으로, 가루차를 만들기 위해 찐 찻잎을 압착하여 수분과 기름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어서 남은 섬유질을 절구에 찧어 가루로 만든 다음, 특수한 틀에 넣어 둥글게 성형한 후 밀랍으로 코팅하여 완성했다. 휘종은 점다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이 방법이 일본의 말차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렸다.
하지만 휘종은 차 산업에 대한 통제를 통해 세수를 늘리려 했고, 전매법을 시행하여 차 산업의 효율성을 저하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부정부패와 민란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휘종은 개인 소장품을 강제로 수집하기 위해 명금국을 만들고, 태호석을 수집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고, 휘종은 현실 감각을 잃어갔다. 결국, 폭정에 반발한 방랍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소설 '수호전'의 배경이 되었다.
내란 이후에도 외적인 위협이 다가왔다. 1115년, 여진족과 연합하여 송나라를 공격하던 요나라를 처치하기 위해 휘종은 '해상의 맹약'을 체결했으나, 그의 군사적 결단력 부족으로 요나라에 대한 출병이 지연되었다.
결국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복하자, 휘종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금나라를 배신하고 요나라와 협공하기로 모의했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금태종은 분노하여 군을 파견했다. 휘종은 황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안전한 남쪽으로 도망쳤으나,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휘종은 태종의 요구에 따라 막대한 돈과 자원을 지불해야 했고, 그의 섣부른 전쟁 도발로 송나라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